[북리뷰.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피에르 바야르

원제: Comment Parler Des Livres Que L’on N’a Pas lus? by Pierre Bayard, Les Editions de Minuit, Paris (2007), 여름언덕(2008)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피에르 바야르,pierre bayard

나는 내가 평문을 써야 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 오스카 와일드

약호표(저자가 각 책들을 평가하는 분류 기호)
Op. cit. 앞에서 인용한 책
Ibid. 같은 책
UB(Unknown Book) 전혀 접해보지 못한 책
SB(Skimmed Book) 대충 뒤적거려 본 책
HB(Heard Book)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책
FB(Forgotten Book) 읽었지만 내용을 잊어버린 책
++ 매우 긍정적, + 긍정적, - 부정적, — 매우 부정적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르거나 혹은 무리의 대화에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혹은 말해아만 하는 기회에 놓일 때에 대해서 애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었지만 제목만 기억하는 책, 읽었지만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책은 우리가 읽은 책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저자의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인가요?

이 북리뷰는 책을 읽으면서 읽을만한 구절을 뽑아 정리한 것입니다. 이 북리뷰 혹은 정리를 잘 읽어보고 본인이 구입할 만한 책인지를 잘 판별하여 구매결정하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텍스트를 만나는 다양한 형태들은 대부분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비독서의 좋은 점을 자랑하는 책을 찾기가 힘들다, 그 이유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내면화된 두려움에 부닥치게 하며, 다음 세 가지가 작용하는 듯 하다.

  1. 독서의 의무 - ‘우리는 독서가 신성시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머지 않아 사라질 테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게 사실이다.

  2. 정독해야할 의무 -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사람들로서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정독하지 않고 대충 읽어보기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 강의자들 대부분이 그런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 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3. 책들에 대한 담론 -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임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비독서의 방식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경우
우리는 그 거대한 도서보관소의 진열대들 사이를 돌아다녔네. 그러나 자네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나에게는 그리 놀라운 광경은 아니었다네. 그 도서 진열대들은 수비군 사열식보다 더 놀라울 게 없었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으로 셈을 해본 뒤 나는 아주 뜻밖의 결과를 얻었다네, 사실 거기에 들어서기 전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네. 만약 내가 하루에 책을 한 권씩 읽어나간다면, 물론 그로 인해 많이 구속을 받게 되긴 하겠지만 언젠가는 책들을 모조리 섭렵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성계에 모종의 입지를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일세. 어쩌다가 하루씩 독서를 거르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야. 한데 우리의 산책이 한없이 길어지기에 사서에게 대체 이 터무니없이 큰 도서관에 책이 몇 권이나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는가? 자그마치 3백 50만 권이라는 거야! 그가 그렇게 대답했을 때, 우린 겨우 70만 분의 1에 해당하는 책들을 둘러본 참이었지. 그의 대답을 듣고 나는 셈을 그만두어버렸다네. 다른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겠네. 정부 청사로 돌아온 나는 종이와 연필을 들고 다시 한 번 계산을 해보았지. 내가 생각한 방식대로 한다면, 1만 년은 걸려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더군!

“장군님! 제가 어떻게 이 많은 책들을 모두 알 수 있는지 궁금하지요? 장군님께 말씀드리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책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 아닌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나를 보더니 그가 설명을 하려들더군. 훌륭한 사서가 되는 비결은 자신이 맡은 모든 책들에서 제목과 목차 외에는 절대 읽지 않는 거라고 말이야. 그는 이렇게 말했네. “책의 내용 속으로 코를 들이미는 자는 도서관에서 일하긴 글러먹은 사람이오! 그는 절대로 총체적 시각을 가질 수 없단 말입니다!”

소통과 연결선들, 교양인이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지 특정의 어떤 책이 아니다. 그것은 철도 교통 책임자가 여러 기차들 간의 관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시 말해서 그는 특정 기차의 개별적 내용물이 아니라 기차들이 어떻게 교차하고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안다. 불행하게도 교양을 쌓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으나, 교양인들은 교양이란 무엇보다 우선 ‘오리엔테이션’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내부는 외부보다 덜 중요하다. 혹은, 책의 내부는 바로 책의 외부요, 각각의 책에서 중요한 것은 나란히 있는 책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이스의 율리시즈; 오디세이아의 모작, 그리고 의식의 흐름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 사건이 더블린에서 하루 동안에 전개되는 책이라는 것….
게다가, 뒤에 가서 우리의 독서에 대한 환기의 기반이 되는 권력관계를 분석할 때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나는 조이스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움 없이 환기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어떤 책에 관한 대화는 겉보기와는 달리 대부분 그 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폭넓은 앙상블 즉 특정 순간 특정 교양이 의거하는 결정적인 모든 책들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진짜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내가 ‘집단 도서관’이라 명명하고자 하는 바로 이 앙상블이다. 책들에 관한 담론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전체를 숙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비독서는 수동인가 능동인가?

당신은 능동적으로 책을 읽지 않는가, 수동적으로 책을 읽지 않는가?

무수히 많은 책들 속에서 침몰 당하지 않기 위해 그 책들과 체계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하나의 진정한 활동이다.



   

첫 번째 경우.

아예 책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으로, 여기서 책이란 그 내용과 상황 모두를 의미한다. 그는 책의 주제는 물론 그 책이 다른 책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에도 무관심하며, 어떤 한 책에만 관심을 기울여 다른 책들을 경시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두번째 경우.

무질의 사서, 책의 본질, 즉 그 책이 다른 책과의 관계 속에 처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책 읽기를 스스로 자제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책에 무관심한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내용과 상황 사이의 긴밀한 연관을 이해했기때문에 그렇게 행동하기로 결심한 것이며, 이는 무수한 일반 독서가보다 훨씬 지혜로운 태도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들보다 책을 훨씬 더 존중하는 태도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

발레리: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충분히 그 책에 대한 논평을 쓸 수 있으며, 어떤 책들의 경우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곤란해지기도 한다는 점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교양있는 독자가 도서관을 전체적으로 활용하는 측면에서 펼칠 수 있는 오리엔테이션 능력은 또한 한 권의 책 내부에서도 유효하다. 교양이 있다는 것은 어떤 책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책을 다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 능력이 뛰어날 수록 문제의 책을 읽을 필요성이 덜해진다고도 말할 수 있다.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대충 훑어본다고 해서 책에 대한 평을 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책의 깊은 본성과 교양을 살 찌우는 책의 힘을 존중하면서, 그리고 세부 사실에 빠져 길을 잃게 될 위험을 피하면서 책을 제 것으로 소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어떻든 바로 그것이 폴 발레리 라는 비독서의 대가가 가졌던 견해요, 사실로 확인된 실천이다.

테스트 씨, 발레리 작품 세계의 대표적 주인공.
“나는 독서를 혐오했고, 그래서 내가 좋아한 책들을 몇몇 친구들에게 나누어 줘버리기도 했다. 그래놓고는 나중에,예민한 시기가 지난 뒤에 개중 몇 권을 다시 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여전히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나는 어떤 저술에서 오직 나 자신의 활동에 뭔가를 허용하거나 금지하는 것만 찾기 때문이다.”
책에 대한 이러한 경계심은 우선 전기를 대상으로 한다. 발레리가 문학 비평의 영역에서 유명해진 것은 작품과 저자 사이에 공통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면서부터였다. 아닌게 아니라 19세기의 비평계는 저자를 잘 알아야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저자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젖ㅇ보를 수집하려 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발레리는 이 비평 전통과 단절하여, 사람들이 흔히 하는 생각과는 달리 저자는 작품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제기한다. 작품은 저자의 내부에서 자라나지만 저자를 초월하는 어떤 창작 과정의 소산이므로 그것을 저자에게 환원시키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어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별로 득이 될 게 없다. 결국 작품에게 저자란 그저 지나쳐가는 하나의 장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생트뵈브를 반대함.에서 프루스트는 문학작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과는 다른 어떤 ‘자아’의 소산이라는 이론을 주장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 베르고트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이 이론을 예증한 바 있다.



앙드레 지드와 레옹 도데

소설의 목표는 ‘하나 혹은 여러 가상의 ‘삶’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데 있으며, 등장인물들을 설정하고, 시간과 장소를 고정하고, 여러 사건들을 서술”하는데 있따는 것, 그리고 이는 시와 대립되는 점으로 덕택에 소설은 요약될 수 있음은 물론 큰 손실 없이 번여될 수 도 있다는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고찰들은 모든 소설에 해당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프루스트에게는 별로 적용되지 않는다. (발레리의 논문중)

그의 작품은 “어떤 이미지라도 저자의 고유한 실체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연관들의 풍요로움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발레리 왈: 프루스트의 작품의 가치가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문제없이 읽힐 수 있다는 데 있음을 설명해내는 데 있다.

그의 저작들의 이점은 가깍의 조각들에 있다. 그의 책은 우리가 원하는 어느 페이지에서도 펼치고 읽을 수 있다. 그가 저술한 책의 활력은 결코 선행하는 것, 즉 어떤 점에서는 ‘선취한 환상’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 그 활력은 우리가 그의 텍스트의 조직 자체의 ‘고유한 활동’이라 명명할 수 있는 것에 연관되어 있다.

이 글에서 발레리는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에 ‘부드러운’, ‘쾌적한’, ‘상쾌한’, ‘절제된’, ‘단순한’ 등의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데, 이는 문학비평에서 찬사로 여겨지기 어려운 수식어들이다. 게다가 그의 작품이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애기는 최후의 발길질과 같다.

“책벌레”라는 꼬리표-발레리는 이를 일종의 모욕으로 여긴다.-가 달린 아나톨 프랑스는 자신의 후임자와는 달리 책 속에 파묻혀 산 사람이다.

찌나친 독서는 아나톨 프랑스에게서 독창성을 앗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발레리가 보기에는 바로 그것이 작가가 독서 때문에 다른 저자들에게 종속되면서 처하게 되는 주된 위험이다.

교양을 쌓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책들 속에 파묻히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자신이 창작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요컨대,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내지 못한 아나톨 프랑스는 독서 때문에 망친 작가의 전형이요, 우리는 발레리가 그의 글을 인용하거나 그의 작품을 환기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 그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으려 한 이유가, 그랬다가는 그 역시 바로 그런 자기 상실의 과정에 동참하게 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이해하게 된다.




발레리-베르그송에 관한 담론

발레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문학의 일반 법칙들을 도출하고자 한 사람이다. 그런 작업에 신경을 쓰면 각각의 텍스트가 갖는 입장은 모호해진다. 윌리엄 마르크스가 발레리의 관심은 작품보다는 작품에 대한 관념에 있다고 지적한 것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라고 할 수 있다.

강단 비평이 자신의 비평 작업에서 가능한 최대치의 자료들을 쌓고 문학 외적인 자료들(편지, 사적인 노트 등)에 우월한 중요성을 부여하고자 했다면, 발레리의 비평은 자신의 관찰 영역 안에 오직 작품 자체만을 아니, 작품 이하, 즉 작품에 대한 단순한 관념만 보존하려고 할 만큼 대상을 최대한 제한하고자 한다.

이러한 거리두기의 시학으로 발레리는 사람들이 책과 맺는 관계 양식 중에서 가장 흔한 양식, 즉 대충 읽기의 논거를 정립한다.

훑어보기라는 개념

;선형의 훑어보기. 독자는 텍스트의 첫머리서 시작하여 여러 줄 혹은 여러 페이지를 건너뛰며 끝을 향해 나아가는데, 물론 끝에 이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순환형의 훑어보기. 독자는 페이지 순에 따라 독서를 하는 게 아니라 작품 속을 산책하듯 책을 읽는데, 때로는 맨 끝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이 방식이 첫 번째 방식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한데 책을 이런식으로 파악하는 일은 독서와 비독서의 차이, 혹은 독서에 대한 관념 자체를 상당히 뒤흔들어버린다. 어떤 책에 대해 일정 시간을 보낸 사람들, 말하자면 그 책을 완전히 읽지는 않고 몇 시간 정도 뒤적거린 사람을 어떤 범주에 넣어야 하는가? 그들이 자신이 접한 책에 대해, 과연 우리는 그들이 책을 읽지도 않고 말을 한다고 말할 수 잇는가? 무질의 사서처럼 책 주변에만 머무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책을 깊이 탐독하되 그 책의 위치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떤 책 속으로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모든 책 속을 돌아다니느 사람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은 독자인지 자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앞으로는 점점 더 그렇게 되겠찌만-, 무엇이 비독서이고 무엇이 독서인지를 명확히 규정하기란 어렵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하나의 주어진 문화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책들의 경우, 참으로 그것들을 읽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독서와 비독서의 중간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

움베르토 에코. 어떤 책을 직접 접해야만 그 책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 책에 대해 다른 독자들이 한 얘기를 듣거나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면 말이다.


오리엔테이션 이론

교양은 책들을 집단 도서관 속에 위치시킬 수 있는 능력이지 각각의 책 속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는-은 사람들이 말하는 책을 반드시 자신이 직접 접해야만 그 책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거나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따라서 어떤 비물질적인 오브제와의 만남을 가리키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게다가 어떤 책에 담긴 내용에 대해, 그 책을 읽지 않고도 아주 명확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잇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해 쓴 것을 읽거나 아니면 그 책에 대해 하는 말을 듣는 것이다. (발레리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이런 방식으로 읽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언급하게 되는 많은 책들 - 이 책들 중에는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책들도 있다.-은 한 번도 우리의 수중에 들어온 적이 없는 책들이다.(이따금 우리는 이와는 정반대라고 확신하지만 말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자.바스커빌과 살인자의 대면. 어느 수도원에서 연쇄살인이 일어난다. 이 살인 사건은 수도원에 존재하는 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이 금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다. 이 금서를 읽은 모든 수도사는 살해 당했는데, 그 이유는 이 금서가 ‘웃음’을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에, ‘신’이라는 것 또한 우습게 만들 수도 있을 가능성을 두려워 한 어느 한 수도사의 걱정 때문이었다.살인 방법이 기발한데, 이 수도사는 그 금서의 오른쪽 윗 귀퉁이에 독을 발라놓아, 책을 넘기면 넘길수록, 읽는 사람도 모르게, 침을 묻혀가며 읽다가 중독되는 줄도 모른채 살인을 해왔던 것이다.

‘다른 텍스트들 속에 숨겨져 있는 듯한 이 텍스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저 ‘시학’의 제2권으로, 도서관의 도서목록에 아직 기입되지 않은 저술이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번에는 웃음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문학에 관한 자신의 성찰을 이어나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책이기 때문이오. 이 인간이 쓴 책 한 권 한 권은 기독교가 수세기에 걸쳐 축적한 학의 일부를 파괴시켰소… 한데 보에티우스라는 자가 이 철학자의 책에 주석을 달자 하느님 말씀의 책은 인간의 히문으로 변질되면서 삼단논법의 희롱을 받아왔소.”

“희극, 즉 코미디라는 말은 코마이 Komai (시골마을)라는 말에서 비롯됩니다. 말하자면 희극이라는 것은 시골 마을에서 식사나 잔치 뒤에 벌어지는 흥겨운 여흥극인 셈이지요. 희극이란 유명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천하고 어리석으나 사악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희극은 등장인물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희극은 보통 사람의 모자라는 면이나 악덕을 왜곡시켜 보여줌으로써 우스꽝스런 효과를 연출하지요.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을 교육적 가치까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힘으로 봅니다. 기지 넘치는 수수께끼와 예기치 못한 비유를 통해 마치 거짓말을 하듯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는 다르게 사물들을 보여주지만, 이를 통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 사물들을 좀 더 잘 관찰하게 하여, ‘아하, 실상은 이러한 것인데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하고 감탄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 맞습니까?”

한데 이에 못잖게 중요한 세 번째 요소-작품의 내적 요소가 아니라 외적인 요소-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그 책의 내용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데, 그것은 바로 그 책이 야기하는 반응들이다. 책이란 그 자체로 한정되는 게 아니라, 유포된 뒤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해 주고받는 일련의 교환 전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대화 내용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곧 그 책을 파악하거나 읽는 일이 된다.

‘묵시록’의 예언들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범죄의 성격이 일곱 번의 나팔소리에 관한 텍스트와 부합한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에코의 소설은 우리가 화제로 삼는 책들이 “실재”하는 책들과는 별 상관이 없으며- 그 책들을 손에 넣을 방도도 없지 않은가?-대개는 단지 ‘화면 책 들livres-ecrans’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유년기의 추억들 중에서, 읫기에 받아들여지기가 더 어려운 다른 추억들을 숨기는 기능을 하는 기만적인 추억들을 가리키기 위해 “화면 추억(souvenir-ecran)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이에 관해서는 그의 ‘신경증, 정신병, 성도착’의 내용중 ‘화면 추억들에 대하여’를 살펴볼 것.

텍스트를 접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저작의 투사적 특성만 더욱 강화시키게 되며, 그럴 때 책은 두 사람 각각의 갖가지 환상을 담는 그릇이 된다.


독서를 시작하는 즉시, 아니, 그 이전부터 이미 우리는 책들에 대해 우리에게 말을 하기 시작하며 - 먼저 우리의 마음속으로, 뒤이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런 연후에는 영원히 가정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진짜 책은 저 멀리 치워버리고서 바로 그 담론들과 견해들만 상대하게 되는 것이다.


발레리보다는 특히 에코와 더불어 책은 우리가 불분명한 방식으로 담론을 나누는, 우리의 욕망과 환상들이 끊임없이 뒤얽히는 모호한 오브제로 나타난다. 끝을 알 수 없는 도서관 속에 파묻힌 찾을 수 없는 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권은 살아가면서 우리가 화제로 삼는 대부분의 책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재구성된 오브제들의 도달할 수 없는 모델과 같은 존재로써, 그 책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언어 저 너머 어딘가에 파묻혀 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언젠가는 그 책을 손에 넣으리라는 희망은 부질없는 꿈일 뿐이다.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

몽테뉴와 더불어, 우리가 읽었지만 잊어버린 책,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책을 과연 읽은 책이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바스커빌이 책을 펼쳐보지도 않고 논평한다고해서 터무니없다고만 할 수는 없다.

정도가 좀 심한 것 같기는 하지만, 몽테뉴가 책과 맺는 관계는 사실 우리가 책과 맺는 관계의 진실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동질의 책을 기억하는 것이 부분적 독서에서 뽑아낸 조각들, 서로 뒤얽혀 있기 일쑤인데다 우리의 개인적 환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그 조각들을 기인한다. 말하자면 다른 조각들을 감추는 것이 주목적인, 프로이트가 말한 소위 ‘화면 추억’과 유사한 날조된 조각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단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어쩌면 이 점이 더 크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망각과 대면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담론의 상황들

사교 생활에서
그레이엄 그린. 자신이 읽어보지 않은 책에 대한 견해를 표명해야 하는 악몽 같은 상황을 이야기. 프로이트가 ‘시험의 꿈’이라 명명한 것-꿈꾸는 사람은 자신이 전혀 준비하지 못한 시험을 보아야 한다고 상상하며 공포에 질린다.


엘리트주의 소설가 벤자민 덱스터

간간이 대중이 뜻밖이라는 듯 놀라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마틴스는 이 시험에서 썩 잘 탈출하는데,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가 어떤 질문이 제기되더라도 흔들림 없이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
;마틴스가 보이는 당당한 태도는 일면 그의 성격 덕택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 모임의 주선자와 대중이 그에게 부여한 권위 있는 지위 덕분이기도 하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은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한, 그가 차지하고 있는 상징적 위치 때문에 그는 헛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가정에서 애초부터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주제에 대해 모르는 것처럼 보이면 보일 수록 대중에게는 역설적으로 더욱 더 설득력 있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스타인’처럼 짧고 뾰족한 이름, ‘울프’처럼 둥근 조약돌 같은 이름 등.

권위를 누리는 지위는 종종 어떤 텍스트의 단순한 인용이 곧 그 자신의 권위를 세우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권위를 반박하는 방식으로 간주될 수 있을 만큼 의견 교환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마틴스는 벤자민 덱스터를 서부극 전통과 연결시켜더라도 별로 반박 당하게 될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의 그런 주장들은 독창적인 조명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아니면 도가 지나치다 싶은 경우라 해도 유머로 간주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든 발언의 정당성에 대한 인정이 이미 발언 자체를 앞서고 있기 때문에 발언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햄릿에 관한 앙케트, 귀머거리들의 대화

귀머거리들의 대화는 어떤 한 권의 책의 경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귀머거리들의 대화는 마틴스가 말하는 두 저자 사이의 불일치에만 관계되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진영이 두 부류의 책들, 혹은 서로 다른 두 도서관에 입각하여 대화를 나누려 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관계된다. 단순히 두 권의 책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차이로 인해 화해가 불가능한 이름들의 리스트(덱스터 대 덱스터, 그레이 대 그레이), 어쩌면 양립불가능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두 문화의 대립이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개성이 구축되는 기반일 뿐 아니라 텍스트들이나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구성하는 기반이기도 한 이 책들의 앙상블-너나없이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집단 도서관의 하위 앙상블이라 할 수 있는-을 우리는 ‘내면 도서관’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살펴본 소설 속의 상황에서는 구체적인 몇몇 제목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 도서관은 특히, 마치 몽테뉴의 도서관처럼, 망각된 책들과 가상의 책들-우리는 이 책들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의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위의 소설에서 빚어지는 귀머거리들의 대화는 대중의 내면 도서관과 마틴스의 내면 도서관이 서로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하자면 서로가 만날 수 있는 그 표면이 협소하다는 데서 생겨난다. 토론은 어떤 책에 한정되지 않으며, 몇 권의 책 제목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그보다 훨씬 폭넓게, 책과 문학의 개념 자체에 놓이고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도서관 사이의 소통이 쉽지 않을 때, 양자를 서로 소통시키려는 시도는 불가피하게 긴장을 야기하게 된다.


선생 앞에서

전문가들을 만족시키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반드시 책을 펼쳐보지 않고도 그 책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제시할 수 있따는 사실이 티브 족의 경우를 통해 확인된다.

아무리 그래봤자 소용이 없다. 묘하게도 티브 족은 앵글로색슨 족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어서, 망자들이 걸어다닌다는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죽은 이들은 걸을 수가 없어요.”하고 청중들이 마치 한 사람처럼 이구동성으로 항의했다.
아무래도 타협을 해야겠다 싶어 내가 말했다. “‘유령’은 죽은 사람의 그림자예요.”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이의를 제기했대. “죽은 이들에게는 그림자가 없어요.”
“하지만 제 고향의 유령들에겐 그림자가 분명히 있어요.”하고 내가 좀 쌀쌀맞게 말했다.
그러자 노 추장이 나서서 좌중에서 곧바로 터져 나오는 불신의 종알거림을 잠재우고는, 미신을 믿는 무식한 젊은이들이 공들여 만든 신통찮은 작품을 대했을 때 예의상 취해주는 그런 꾸며낸 표정을 지으며 나의 말에 찬동하고 나섰다. “당신네 나라에서는 죽은 이들이 꼭 좀비가 아니어도 아마 틀림없이 걸어 다닐 수가 있을 거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자루 깊이 손을 넣어 말린 콜라나무 열매 한 조각을 꺼내더니, 중독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한쪽 끝을 깨물어 먹은 뒤 나머지를 화해의 표시로 내게 내밀었다.
로라 보헤넌의 이야기를 통해 극작품 전체가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데, 그녀는 양보를 거듭하며 얘기를 해나가지만, 티브 족과의 문화적 거리를 뛰어넘어 셰익스피어의 이 극작품을 바탕으로 그들과 함께 어느 정도 공통된 하나의 담론 대상을 구성하는 데는 끝내 실패하고 만다.


작가 앞에서

넷의 주체가 등장한다.
정말 책을 썼지만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과, 그 책을 고쳐주겠다고 설득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넣고싶은 욕망을 가진 자신의 이야기를 넣은 사람, 협박하여 공저자로 자신의 이름을 끼워넣은 읽은 사람 그리고 나머지 두 이야기의 합인 책을 읽은 저자들. 원저자는 다른 이들이 자신이 쓴 내용과 다른 책의 내용을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협박 공저자는 자신이 쓰지 않았고, 원저자가 읽어보지 않은 책의 내용이 들통나는 것이 두렵고, 독자들은 그들을 의심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덧씌운 저자는 자신이 이야기를 고쳐 써넣었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빌 머레이와 그의 마멋의 경우. 누군가를 유혹하는 이상적인 방법은 시간을 정지시키고, 자신은 읽지 않았으나 상대가 좋아하는 책 얘기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한데 우리는 어떤 두 사람이 너무나 가까워서 그들의 내면의 책이 일정시간 동안만이라도 서로 일치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의 연애가 어린 시절부터 읽은 책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우선 그것은 소설의 주인공들이 연애 상대의 선택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을 통해 우리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형을 그려놓고 다른 사람들을 그 이상형에 맞추려고 한다. 물론 대개는 목표 달성에 실패하지만 말이다. 더욱 더 묘한 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책들이 남이 모르는 우리만의 세계를 디자인하고 있으며, 그 세계에 다른 사람이 등장인물의 자격으로 동참할 수 있기를 우리가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와 동일한 독서를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공통된 독서-동일한 ‘비독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롤드 래미스 감독의 사랑의 블랙홀

마멋으로 앞으로의 겨울이 지속될지를 점치는 마을. 마멋점을 생중계한 후, 바로 떠나기로 했던 필은 폭설 때문에 마을에 갇히게 되고, 다음날 호텔에서 흘러나오는 똑같은 방송 멘트에 의해 똑같은 하루를 며칠동안 계속해서 살아가게 된다. 그는 은행의 돈을 훔치기도 하고(빈틈을 찾아낼 수 있으니),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하여 그녀가 원하는 이상형의 상을 하나 둘 알아가며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하나 둘 씩 배워가며 하나 둘 씩 대답하게 된다.

두 무대-그날 하루라는 무대와, 과거와 미래의 다른 날들의 무대-에 출현하는 필은 시간 속에 고정된 그의 상황 덕택에 언제나 양방향의 유희가 가능하다. 예를 들면 그는 사랑하는 리타에게, 눈 위에 그녀의 얼굴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녀의 얼굴을 연구할 시간이 있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이상적으로 공유되는 사랑이란 어쩌면 타자를 구성하는 토대, 즉 타자의 가장 은밀한 책들에 이르는 길을 여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내면의 책’들이 우리의 환상들처럼 그래도 어느 정도 고정된 것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화면 책’들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변화를 멈추게 하려는 생각은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타자’에게 끊임없이 그가 듣고 싶어하는 말들만 한다는 것, 언제나 정확히 그가 기대하는 존재이고자 한다는 것,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타자’로서의 그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다보니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인물이 되며, 필은 바로 그런 자신의 친절로 단 하루만에 리타의 마음을 얻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매일 아침 똑같은 날 다시 깨어나던 그 방에서 그녀와 함께 잠이 든 그는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옆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면서 처음으로 알람 라디오에서 다른 음악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해서 그는 오늘과 내일을 가로막고 있던 그 넘을 수 없는 시간의 벽을, 한계를 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읽지않은 책에 대해 말할 때 대처 요령

부끄러워하지 말 것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책을 꾸며낼 것
자기 얘기를 할 것

에밀 파게와 피에르 바야르의 비교는 유의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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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Estetica  de la promiscuided - 잡탕의 미학

 

장미의 이름 - 움베르토 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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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킬프군단 - 오에 겐자부로
Hope and patience, hope and patience! - 희망과 인내, 희망과 인내로!

 

베토벤의 생애 - 로맹 롤랑
Durch Leiden Freude! -괴로움을 뛰어넘어 기쁨으로!

Habent sua fata libeili -책은 책들 자체의 운명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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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보 가의 사람들 - 로제 마르탱 뒤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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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 주제 사라마구
Memento, homo, quia pulvis es et in pulverm reverteris -인간이여, 너는 흙이며 흙으로 다시 돌아갈 거임을 기억하라
라틴어 [메멘토, 호모, 키아플비스 에스 에트 인 플베렘 레베르테리스] 라고 읽습니다.

 

걸리버 여행기 - 조나단 스위프트
Proper word in proper place -적당한 곳에 적당한 단어를
저자 스위프트 曰 "좋은 문체란 적당한 곳에 적당한 단어를"

인간은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 아니라 '이성적일 수 있는 동물(animal rations capax)'
스위프트가 정의 본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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