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t of Travel - Alain de Botton (2002) Milkweed agency
밑줄 긋게 만든 구절들
출발
_기대에 대하여_장소: 런던 해머스미스, 바베이도스_안내자: J.K. 위스망스
계절은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듯이 서서히 쇠퇴해갔다.
어느새 겨울은 가혹한 현실로 자리를 잡았다.
르네상스 시대 이탤리 화가: 만테냐, 베로네세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완벽한 배경이 될 만한 하늘이었다. 아니면 침대에서 종일 뭉그적대는 날의 배경이 되거나.
비가 억수로 퍼붓던 어느 날 저녁 공원 옆을 지나다가 지난 여름 더위가 한창일 때 땅에 드러누워 신발을 벗고 맨발로 풀잎을 쓰다듬던 기억이 났다.
18세기 극작가 샹포르
'매일 아침 두꺼비 한 마리를 삼켜야만 하루 종일 그보다 더 역겨운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윌리엄 호지스_다시 찾은 타히티
사람의 계획이(심지어 인생 전체도) 아주 단순하고 어설픈 행복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 감동적이면서도 진부한 예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철학적인 문제들, 즉 실용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사고를 요구하는 쟁점들이 제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_인간적 번영
스틸턴 치즈?
우리는 여행의 현실이 우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하다. 물론 비관주의자들은 현실이 반드시 실망스럽다고 주장한다.
포마이카 판벽?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흔히 잊곤 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아마 예술 작품에도 얼마간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술 작품에서도 얼마간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술 작품에서도 상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순화와 선택이 이루어진다. 예술적인 이야기들은 현실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것들을 뭉텅 생략해버린다. 예를 들면 기행문에서 화자는 오후 내내 여행을 하여 X라는 산 위의 작은 도시에 도착했고, 그곳의 중세수도원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에 눈을 떠보니 아침 안개가 끼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오후 내내 여행할"수 없다. 우리는 기차에 앉는다. 배 속에서는 점심에 먹은 것이 잘 내려가지 않는다. 좌석 덮개는 회색이다. 창문 밖으로 들판을 내다본다. 열차 안의 뒷자리를 돌아본다. 의식 속에서는 불안이 맴돌며 북을 쳐댄다. 맞은편 좌석 위의 짐칸에 놓인 옷가방의 화물 표지를 본다. 창턱을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검지 손톱의 갈라진 부분에 실오라기가 낀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물 한 방울이 먼지에 덮인 유리창에 진흙탕 길을 만들며 흘러내린다. 기차 티켓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진다. 들판을 돌아본다. 계속 비가 내린다. 마침내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차는 철교를 통과하더니, 알 수 없는 이유로 멈춘다. 파리 한 마리가 창문에 앉는다. 이렇게 자세히 늘어놓아도 "그는 오후 내내 여행했다"라는 기만적인 문장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맨 처음 1분에 해당하는 이야기도 다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귀중한 요소들은 현실보다도 예술과 기대 속에서 더 쉽게 경험하게 된다.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은 생략과 압축을 감행한다. 이런 상상력은 따분한 시간들을 잘라내고, 우리의 관심을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의 17세기 화가들
테니르스, 얀 스텐, 렘브란트, 오스타데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적어도 의식적인 정신에게는 우연한 현상으로 보일 것이다. 이 짧은 시간에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수용하게 된다. 이 시간에는 모처럼 과거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들이 형성되고, 불안이 완화된다. 그러나 이 상태는 10분 이상 지속되는 일이 드물다.
책. 에밀 뒤르켐 - 자살론
스코틀랜드는 17세기에 올리버 크롬웰에게 추방당한 영국 가톨릭 교도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우리는 후식으로 크렘 캐러멜을 2인분 주문했다. 크렘이 나왔다. 크렘은 크기는 하지만 생긴 것이 시원치 않았다. 주방에서 바닥에 한번 떨어진 것 같았다.
인간은 호텔을 건축하고, 만을 준설하는 등 엄청난 프로젝트들을 이루어내면서도, 기본적인 심리적 매듭 몇 개로 그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 울화가 치밀 때면 문명의 이점들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지는지! 이런 정신적 매듭들이 얼마나 처치 곤란인지를 생각하다 보면, 고대 철학자들의 준엄하면서도 비꼬는 느낌이 없지 않은 지혜가 떠오른다. 그들은 번영과 세련으로부터 물러나 통이나 진흙 오두막 속에 살면서, 행복의 핵심적 요소는 물질적인 것이나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위스망스의 말에 따르면, 데제생트는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더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실제 경험에서는 우리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 때문에 정작 우리가 보러 간 것은 희석되고 만다. 우리는 근심스러운 미래에 의해서 현재로부터 끌려나온다. 당혹스러운 신체적, 심리적 요구드르 때문에 미학적 요소들의 감상은 방해를 받는다.
나는 대제생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했다. 그러나 나 역시 그냥 집에 눌러앉아 얇은 종이로 만든 브리티시 항공사의 비행 시간표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여행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낀 적이 몇 번 있었다.
_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 장소: 휴게소, 공항, 비행기, 기차_안내자: 샤를 보들레르, 에드워드 호퍼
이 건물은 건축학적으로는 비참한 몰골이었다. 안에서는 튀김용 기름 냄새와 바닥 광택제의 레몬향이 났다. 음식은 끈적끈적했으며, 탁자에는 오래 전에 떠난 여행자가 식사를 하다 떨어뜨린 케첩들이 섬처럼 점점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이 휴게소는 왠지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모든 주거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고속도로 옆의 언덕에 자리잡은 이 외딴 휴게소에는 시가 있었다. 이런 매력 때문에 나는 다른 여행 장소, 이와 마찬가지로 예기치 않게 시적인 느낌을 주는 장소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공항 터미널, 항구, 역, 모텔. 더불어 어느 19세기 작가의 작품과 그에게서 영감을 받은 한 20세기 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장소의 힘에 특별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 "일상"(이 시인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이 기억나지 않는 다른 곳, 먼 곳, 다른 대륙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날씨가 더 따뜻한 곳, '여행에의 초대'에 나오는 전설적인 2행에 따르면 모든 것이 "질서와 아름다움/호사와 고요와 쾌락 (ordre et beaute / Luxe, calme et volupte)"인 곳. 그러나 그는 여기에 따르는 어려움도 알고 있었다.
결국 보들레르는 평생 여행에 대하여 양면적인 태도를 부여주었다. '항해'에서는 멀리서 돌아온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빈정거리며 상상한다.
우리는 별들을 보았지,
파도도 보았지, 모래도 보았지.
그러나 수많은 위기와 예측 못 했던 재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따분했다네, 여기서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그는 여행을 하고 싶은 욕망에는 항상 공감했으며, 늘 그런 바람을 품고 있었다.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이 환자는 난방장치 앞에서 앓고 싶어하며,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 않는다."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떠나기 위해서 떠났다."
열차야, 나를 너와 함께 데려가다오! 배야, 나를 여기서 몰래 빼내다오!
나를 멀리, 멀리 데려가다오. 이곳의 진흙은 우리 눈물로 만들어졌구나!"
보들레르의 Moesta et errabunda의 일부
"보들레르는 새로운 종류의 낭만적 노스탤지어를 발명했다. 그것은 플랫폼의 시(poesis des departs)이며, 대합실의 시(poesiedes salles d'attente)이다." - T.S. 엘리엇
'휴게소의 시(poesie des stations-service)이며, 공항의 시(poesie des aeroports)라고.
새로운 시점은 풍경에 질서와 논리를 부여한다. 도로는 산을 피하기 위해서 곡선을 그리고, 강은 호수로 향하는 길을 따르고, 고압선 철탑은 발전소에서 도시로 이어지고, 땅에서 보면 제멋대로인 것 같은 도로들이 잘 짜인 격자로 드러난다. 눈은 자신이 보는 것을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일치시키려고 한다. 새로운 언어로 익숙한 책을 판독하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 불빛들은 뉴베리가 틀림없어. 저 도로는 M4에서 가지를 친 A33이야. 그리고 내내 우리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우리의 눈에 감추어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의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드문 세상이다. 그러나 매나 신에게는 우리가 늘 그렇게 보일 것이다.
화가: 다 빈치, 푸생, 클로드, 컨스터블, 호퍼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주제: 호텔, 도로와 주유소, 식당과 카페테리아, 기차에서 본 풍경, 기차 안과 열차의 모습
이들 중심 주제는 외로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혼자 앉아 있거나 서 있고, 호텔 침대의 가장자리에서 편지를 읽거나 바에서 술을 마신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호텔 로비에서 책을 읽는다.
예)호텔, 도로와 주유소, 식당과 카페테리아, 기차에서 본 풍경, 기차 안과 열차의 모습, (자동 판매식 식당)
이 여자와 비슷하게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혼자서 커피를 마시는 남자들과 여자들. 일반적으로 공동의 고립감은 혼자서 외로운 사람이 느끼는 압박감을 덜어주는 유익한 효과가 있다. 도로변의 식당이나 심야 카페테리아, 호텔의 로비나 역의 카페 같은 외로운 공공장소에서 우리는 고립의 느낌을 희석할 수 있고, 따라서 공동체에 대한 독특한 느낌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생각도 쉬워진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고 있을때나, 눈으로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을 쫓을 때. 우리의 정신에는 신경증적이고, 검열관 같고, 실용적인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의식에 뭔가 어려운 것이 떠오를 때면 모른 척하고, 또 기억이나 갈망이나 내성적이고 독창적인 관념들은 두려워하고 행정적이고 비인격적인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음악이나 풍경은 이런 부분이 잠시 한눈을 팔도록 유도한다.
18세기 말부터는 공동체의 관행이 아니라 방랑자가 되는 것에서 동료 의식이 생긴다. 그 결과 본질적인 고립과 침묵과 외로움이 일반적인 사회의 엄격함, 차가운 금욕, 이기적인 편안함에 맞서서 자연과 공동체의 운반자가 된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 시골과 도시 중
동기
_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장소: 암스테르담_ 안내자: 귀스타브 플로베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이국적이라는 형용사가 어울릴 것 같은 즐거움이다. 이국적 정서는 특정한 곳에서 나온다. Aankomst(도착)에서 a를 두 개 쓰는 것에, 외국어 밑에 영어가 쓰여 있는 것에, Uitgang(출구)에서 u와 i가 잇달아 나오는 것에, "책상"이라는 말을 쓸 곳에 balies라고 쓰는 것에, 프루티거 체나 유니버스 체와 같은 실용적이면서도 모더니즘 냄새가 나는 글자체를 사요한 것에서.
더스테일 운동; de Stijl 운동. 영어로는 the Style 1917년 네덜란드에서 발간된 잡지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몬드리안 등을 중심으로 한 추상 회화 운동.
1823년 외젠 들라크루아는 그림으로 동야의 이국적 정취를 포착하기 위해서 북아프리카로 떠났다.
건물은 묘한 흰색의 모르타르로 붙여놓은 길쭉한 연분홍 벽돌로 쌓아올렸다.(영국이나 북아메리카의 벽돌 쌓기보다 규칙적이었으며, 프랑스나 독일 건물의 벽돌들과는 달리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다). 거리에는 20세기 초에 지은 좁은 아파트 블록들이 길게 줄을 지어 있었다. 1층에는 커다란 창문들이 달려 있었고, 집마다 밖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대학 도시가 생각났다). 거리의 시설들은 뭐랄까, 민주적인 꾀죄죄함 같은 것을 과시하고 있었다. 겉을 화려하게 꾸민 건물은 없었따. 곧은 도로에는 군데군데 작은 공원들이 박혀 있어, 이 도시를 계획한 사람ㄷ를이 사회주의적인 전원도시를 꿈꾸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다른 나라에서 현관문 같은 작은 것에 유혹을 느낄까? 왜 전차가 있고 사람들이 집에 커튼을 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장소에 사랑을 느낄까? 왜 전차가 있고 사람들이 집에 커튼을 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장소에 사랑을 느낄까? 그런 작고(또 말없는) 외국적 요소들이 강렬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반응 양식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상대가 빵에 버터를 바르는 방식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또 상대가 구두를 고르는 취향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기도 한다. 이런 사소한 일에 영향을 받는다고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자잘한 것들도 그 속에는 풍붛나 의미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플로베르 기성관념 사전(프랑스 부르주아지의 가장 눈에 띄는 멍청한 편견들을 풍자적으로 분류)
-예술적 노력에 대한 의심
건축가; 모두 백치들. 늘 집 안에 계단을 설치하는 것을 잊는다.
압생트; 매우 강력한 독약. 한 잔만 마셔도 시체가 된다. 기자들은 기사를 쓰면서 이것을 마신다. 베두인족보다도 이것 때문에 죽은 병사가 많다.
-다른 나라(그리고 그곳의 동물)에 대한 불관용과 무지
검다; 늘 앞에 "흑단처럼"이라는 말이 붙어야 한다.
쌍봉낙타; 혹이 두 개이고, 단봉낙타는 혹이 하나이다. 아니면 쌍봉낙타가 혹이 하나이고, 단봉낙타가 두 개이다. 아무도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른다.
야자나무; 지방색을 제공한다.
영국여자; 그들도 예쁜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이탈리아인; 모두 음악에 뛰어나다. 모두 배신을 밥 먹듯이 한다.
존 불; 전형적인 영구인을 가리키는 별명. 영국인의 이름을 모르면 그를 존 불이라고 불러라.
코란; 마호메트가 쓴 책. 전부 여자 이야기이다.
하렘의 여자; 모든 동양 여자는 하렘의 여자이다.
호텔; 스위스에만 일류가 있따.
흑인; 그들의 침이 흰색이고, 그들이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흑인 여자; 백인 여자들보다 뜨겁다(브루넷과 블론드 참조)
-사내다움/진지함
주먹; 프랑스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강철 주먹이 필요하다.
-감상적인 태도
동물; 동물이 말할 수만 있다면! 인간보다 똑똑한 것들도 있을텐데
착각; 아주 많은 것을 가진 척하다가, 그것들을 다 잃었다고 불평한다.
-허세
디드로; 달랑베르는 늘 그를 추종했다. 드니 디드로와 장 르 롱 달랑베르는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백과전서파
-깐깐함/억압된 성
브루넷; 블론드보다 뜨겁다(블론드 참조)
블론드; 브루넷보다 뜨겁다(브루넷 참조)
성; 피해야 할 단어. 대신 "내밀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3) 낙타의 이국정서
플로베르는 카이로에서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가장 훌륭한 것은 낙타입니다. 당나귀처럼 비틀거리고 백조처럼 목을 움직이는 이 묘한 짐승은 암만 봐도 물리지 않습니다. 나는 진이 빠질 때까지 낙타 울음을 흉내내는 연습을 합니다. 집에 갈 때까지 익혀서 가려는 것인데, 그대로 따라하기각 쉽지 않군요.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 비슷한데, 거기에 양치질하면서 떠는 듯한 소리가 덧붙여집니다."
매혹적인 사람이 이국적인 땅에 가게 되면 자신의 나라에서 가지고 있는 매력에 그 사람이 있는 장소가 주는 매력이 보태진다.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것이 사랑이라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을 사랑할 때는 우리 자신의 문화에는 빠져 있는 가치들에 좀더 가깝게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도 따라갈 것이다.
디반; 낮고 긴 의자
데이아네이라의 튜닉도 권태가 내 삶에 달라붙은 것만큼 완벽하게 헤라클레스의 등에 달라붙지는 못했으리라! 다만 권태는 그의 튜닉보다 천천히 내 삶을 갉아먹을 뿐이다.
데이아네이라; 헤라클레스의 부인. 질투 때문에 남편의 옷에 네수스의 피를 발라 보냈는데, 헤라클레스는 이것을 입고 독혈증으로 사망.
플로베르는 사춘기 이후로 잣니이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이 나라와 이 나라 사람들에 대한 그의 증오는 너무 강렬하여, 그는 자신이 프랑스 국민이라는 사실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그는 국적을 부여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했다. 출생지나 선조를 따지지 말고,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장소를 따지자는 것이었다.(그가 정체성에 대한 이런 유연한 개념을 성과 종에까지 확대한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이따금 자신이 사실 여자이고, 낙타이고, 곰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름다운 곰을 사고 싶다. 곰을 그린 그림 말이다. 그것을 액자에 넣어 내 침실에 걸어두고 싶다. 그리고 나의 도덕적 경향과 사회적 습관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아래에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초상'이라고 적어두고 싶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코르시카 섬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면서 쓴 편지에서 플로베르는 이미 자신이 프랑스가 아닌 다른 곳에 속해 있따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치 돼지의 엉덩이에서 다이아몬드를 보듯이 하늘의 태양을 바라보는 저 염병할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역겹다. 나느 젠장 저 노르망디와 아름다운 프랑스(la belle France)가 정말 싫다......
나는 우리가 아랍인들에게 승리를 거둔 것에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패배로 인해 슬픔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거칠고, 인내심 있고, 완강한 사람들, 최후의 원시인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한낮에 낙타 배 아래의 그늘에 누워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치부크를터키인들이 피우는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우리의 훌륭한 문명을 조롱하는데, 그러면 우리 문명은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곤 하지요."
캠신바람; 봄에 사하라 사막에서 이집트로 불어오는 건조한 열풍
소크라테스는 어느 지역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자, "아테네"라고 하지 않고 "세계"라고 대답했다. 플로베르는 루앙(그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에 따르면, 똥[merde]에 익사하는 곳이며, 훌륭한 시민들이 일요일이면 권태 때문에 "멍청한 표정으로 몸을 비트는" 곳이다) 출신이지만, 콧수염의 아버지 아부 차나브는, "약간은 이집트 출신이기도 하오"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_호기심에 대하여:장소:마드리드_ 안내자: 알렉산더 폰봁훔볼트
훔볼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유럽인들이 가보지 않은 먼 나라를 여행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도를 살피거나 여행서를 탐독할 때면 억누르기 힘든 은밀한 매혹을 느끼곤 했다."
훔볼트는 지식의 수준을 바꾸어놓았다.
지구의 자기를 연구했으며, 극지방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자기의 강도가 약해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바다의 수온은 위도보다 해류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561년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를 수도로 정했을 때, 마드리드는 카스티야의 작은 도시로 인구는 2만 명에 불과했다. 무어인의 요새-고딕궁전-오늘날의 부르봉 왕가의 궁전인 팔라시에 레알로 바뀌었다.
16세기에 이 도시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이름을 따서 '마드리드 데 로스 아우스트리아스'로 알려져 잇었다.
17세기 마요르 광장. 푸에르타 델 솔(태양의 문)은 스페인의 정신적, 지리적 중심이 되었다.
소쉬르의 습도계?: 머리카락과 고래뼈로 만들었다.
이 광장은 후안 고메스 데 모라 1619년 건설.
마요르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펠리페 3세의 기마상은 높이가 5미터 43센티미터이고, 잠볼로냐와 피에트로 타카.
훔볼트의 호기심의 수준이 내 수준보다 한참 높았던 것(그리고 그가 나와는 달리 침대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지 않았던 것)은 사실을 찾아나선 여행자는 구경을 하려는 목적을 가진 여행자에 비해서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에 있기 때문이었다.
쓸모에는 (그것을 인정하는) 청중이 따른다.
1800년 하바나. 스페인 해군의 중요한 전략 기지. 지도에는 정확하게 표시 X. 훔볼트가 지리학적 위치 표시.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성당의 신고전주의적 전면은 사바티니가 만들었지만, 6개의 방사상의 예배당과 더불어 33미터짜리 커다란 돔을 거느린 원형의 건물 자체는 프란시스코 카베자스가 만든 것이다.
내가 알게 되는 모든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보다는 나에게 개인적인 유익을 준다는 점에 의해서 정당화되어야했다. 나의 발견은 나에게 생기를 주어야 했다. 그 발견들이 어떤 면에서는 "삶을 고양한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했다. "삶을 고양한다"는 표현은 원래 니체가 사용한 것이다.
진정한 과제는 "삶"을 고양하기 위해서 사실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괴테의 문장을 인용했다.
"나는 나의 활동에 보탬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활력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나를 가르치기만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니체는 또 두 번째 종류의 여행도 제안한다. 이는 우리의 사회와 정체성들이 과거에 의해서 형성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과정에서 연속성과 소속감을 확인하게 되는 여행이다. 이런 여행을 하는 사람은 "덧없고 개별적인 존재를 넘어선 시야를 가지게 되며, 자신이 자신의 집, 종족, 도시의 정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오래된 건물들을 보며 "자신이 완전히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과거로부터의 상속작이자 꽃이자 열매로서 성장해왔으며, 따라서 자신의 존재는 용서받을 수 있고 또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와서 사실들을 발견한 탐험가들은 그런 행동을 통해서 의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해놓았다. 이런 구별은 세월이 흐르면서 거의 불변의 진리로 굳어져, 마드리드의 중요한 것들은 이미 가치가 확정되어버렸다. 라 빌라 광장은 별 1개, 팔라시오 레알은 별 2개,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수도원은 별 3개, 오리엔테 광장은 별 없음. 그런 구별이 반드시 거짓은 아니지만,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안내책자가 어느 유적지를 찬양한다는 것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위 있는 평가에 부응할 만한 태도를 보이라고 압력을 넣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안내책자가 입을 다물고 있는 곳에서는 기쁨이나 흥미가 보장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별 3개짜리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수도원에 들어가기 오래 전부터 나의 반응이 다음과 같은 공식적인 평가에 부응해야 한다느 것을 알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 벽화로 장식된 웅장한 계단은 위층 수도원 회랑으로 통하는데, 이곳의 예배당들은 뒤로갈수록 화려해진다." 그 다음에는 이런 구절이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이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여행자는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훔볼트는 이러한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그가 가본 곳을 그보다 먼저 여행한 유럽인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훔볼트는 상상력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아무런 자의식없이 자신의 관심을 끄는 것을 따라갈 수 있었다.
훔볼트가 1806년 6월 침보라소 산의 폭이 20센티미터인 능선에서 파리에 가졌던 호기심과 연결되는 질문의 사슬은 그가 일곱 살 때 품었던 질문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베를린에 살던 어린 훔볼트는 독일의 다른 지방에서 사는 친척들을 찾아갔다가 자문한다. "왜 어디에나 똑같은 것이 자라지 않는 것일까?" 왜 베를린 근처의 나무들이 바이에른에서는 자라지 않고,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까? 다른 사람들은 그의 호기심이 커가도록 장려했다. 그는 현미경과 자연에 관한 책들을 선물로 받았다.
가족들은 그에게 "어린 화학자"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아이가 그린 식물 스케치를 그녀의 서재 벽에 걸어놓았다. 훔볼트는 남아메리카로 출발할 무렵 기후와 지리가 식물상과 동물상을 규정하는 방식을 관장하는 법칙을 해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일곱 살 때 느꼈던 호기심이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좀더 세련된 형태의 질문으로 나타났다. "양치류는 북부의 노출된 환경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가?" "야자나무가 살 수 있는 고도 상한은 어디인가?"
훔볼트의 흥분은 세상을 향해 물어볼 올바른 질문을 가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언해준다.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파리를 보았을 때 약이 올라 파리채를 휘두를 수도 있고 산을 달려 내려가 '식물 지리론'을 쓰기 시작할 수도 있다.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실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지리적인 문제 때문에 위험은 더 심각해진다. 도시에는 공간적으로 보면, 불과 몇 미터 간격으로 건물이나 기념물들이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감상하는 데에 필요한 준비의 맥락에서 보면, 몇 리그가 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두 번 다시 가보지 못할 수도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를 계속해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여러 가지는 지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외에는 서로 연관성이 없다. 그 연관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 사람 안에는 모여 있기 힘든 넓은 범위의 자질들이 요구 된다. 우리는 어느 거리에서는 고딕 건축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져야 하며, 이어 그 다음 거리에서는 에트루리아 고고학에 매료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마드리드를 방문하는 사람은 18세기 왕궁 팔라시오 레알(나폴리 출신의 디자이너 가스파리니가 호화로운 로코코 중국식으로 장식한 방들로 유명)에 관심을 가진 다음, 몇 분 뒤에는 하얀 회칠을 한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피카소의 '게르니카'를 포함한 20세기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18세기 왕궁 건축 감상에 맛을 들인 사람의 자연스러운 행로는 이 전시관을 완전히 무시하고 프라하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발을 옮기는 것이다.
여행은 피상적인 지리적 논리에 따라서 우리의 호기심을 왜곡한다. 이것은 대학 강좌에서 주제가 아닌 크기에 따라서 책을 권하는 것만큼이나 피상적이다.
인생을 마감할 무렵, 남아메리카 여행이 머나먼 과거의 일이 되었을 때, 훔볼트는 자기 연민과 자존심이 뒤섞인 착잡한 심정으로 불평했다. "사람들은 흔히 내가 식물학, 천문학, 비교해부학 등 너무 많은 일에 동시에 호기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을 알고 끌어안고 싶은 욕망을 품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우리는 그런 것을 막을 수 없다. 오히려 등을 두드려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훔볼트의 여행에 경탄한다고 해서, 가장 매혹적인 도시에서도 이따금씩 그냥 침대에 누워 있다가 다음 비행기를 타고 집에 가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느끼느 사람들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마저 물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풍경
_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장소: 레이크 디스트릭트_ 안내자: 윌리엄 워즈워스
워즈워스의 모든 작품에 깔려 있는 이 철학은 우리의 행복에 대한 요구 그리고 불행의 기원에 대하여 독창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양 사상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시인은 자연-그는 이 자연이 무엇보다도 새, 냇물, 수선화, 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 이 도시의 삶으로 인한 심리적 피해를 치료한느 불가결한 약이라고 말한다.
드 퀸시는 이렇게 설명한다. "1820년까지 워즈워스의 이름은 발에 밟혔다. 1820년부터 1830년까지 그의 이름은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1830년부터 1835년까지 그의 이름은 승리를 거두었다." 사람들의 취향은 느리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독서 대중은 점차 비웃음을 거두고, 나비에게 바치는 찬가나 애기똥풀에게 바치는 소네트에 매혹을 느끼게 되었고, 심지어 그런 시들을 암송하기까지 했다.
워즈워스의 도시에 대한 불만에는 매연, 혼잡, 가난, 추한 외관 등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맑은 공기 법안을 상정하고 빈민가를 정리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그의 비판이 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도시가 우리의 건강보다는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도시가 생명을 파괴하는 여러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비난했다. 사회 위계에서 우리의 지위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질투, 낯선 사람들의 눈앞에서 빛을 발하고 싶은 욕망, 워즈워스의 주장에 따르면, 도시 거주자들은 뚜렷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거리나 저녁 식탁에서 이야기가 되는 것에 귀를 곤두세운다고 한다. 그들은 먹고 살기가 편해도 자신에게 진정으로 부족하지도 않고 또 자신의 행복을 좌우하지도 않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런 혼잡하고 불안한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진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고립된 농가에서사는 것이 오히려 유리했다. 워즈워스는 런던의 집에서 이렇게 썼다. "한 가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다. 어떻게 이웃에 살면서도 서로 낯선 사람으로 살아갈까, 심지어 어떻게 서로의 이름도 모를까?"
페이지.180
고드윈을 읽으면서 정치적 입장이 바뀌었다.
워즈워스는 1802년 여름 어느 젊은 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의 임무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연이 체현하고 있는 가치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위대한 시인은... 어느 정도는 인간의 감정을 교정해야 하네... 사람들의 감정을 좀더 건전하고, 순수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간단히 말해서 자연과 좀더 일치하도록 만들어야 하네."
워즈워스는 자연의 모든 풍경에서 그런 건전, 순수, 영속의 예들을 보았다. 예를 들면 꽃은 겸손과 온유의 모범이었다.
이 햇살과 공기를 나와 함께 마시는
착하고 고요한 생물체여!
그대는 전에도 그랬듯이 나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그대의 온유한 성품까지 조금씩
나누어 주는 것인가!
-데이지에게
또한 동물들은 금욕주의의 전형들이었다.
워즈워스의 시적 야심 가운데 하나는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동물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보통 그런동물을 무시한다. 똑바로 보는 일도 거의 없고,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지도 않는다.
콜리지는 워즈워스의 초기 시들을 돌아보면서, 그 시들의 천재성을 이렇게 규정했다. "일상의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한느 것, 그리고 우리가 관습에 따른 무관심에서 벗어나 우리 앞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을 만났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맛보게 하는 것. 사실 우리 앞의 세계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보고이지만, 익숙함과 이기적인 염려 때문에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워즈워스에 따르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내부의 선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냇물과 숲이 우거진 웅장한 골짜기를 굽어보는 바위 가장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자연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도 의미심장하게 바꿀 수 있다.
워즈워스는 자연 속에서 살면서 자신의 성격이 경쟁, 질투, 불안에 저항하는 쪽으로 형성되어갔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워즈워스는 이렇게 찬양했다.
나는 위대하거나 아름다운 것들을 통해서
인간을 처음으로 보았고,
그러한 것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인간과 교감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보통 세상의
모든 곳에서 들끓고 잇는
비열함, 이기적 관심,
거친 행동거지, 그리고 천한 욕정에 대한
확실한 안전판과 방호벽이 세워졌다.
시
엠과 나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우리는 도착한 지 사흘 만에 런던행 기차에 올랐다. 우리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휴대전화로 여러 차례 전화를 했는데, 들판과 산업도시 몇 개를 지나도록 대화가 이어지면서, 그가 자신의 돈을 빌려간 짐이라는 사람을 찾고 있따는 사실을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알게 되었다.
"이 수많은 풍경들이 내 마음 앞에서 둥둥 떠다니느 지금 이 순간, 내 평생 단 하루도 이 이미지들로부터 행복을 얻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큰 기쁨이 밀려 온다."
그는 자연 속의 어떤 장면들은 우리와 함께 평생 지속되며, 그 장면이 우리의 의식을 찾아올때마다 현재의 어려움과 반대되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 속의 이러한 경험을 "시간의 점(spot)"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때는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세운다.
워즈워스는 자연 속에 이런 작지만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는 믿음 때문에 자신의 많은 시들에 매우 구체적인 부제를 붙이기도 했다. 예컨대 '틴턴 사원'의 부제-"1798년 7월 13일 여행 중에 와이 강변을 다시 찾고"는 정확한 날짜를 명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산골에서 골짜기를 굽어보며 보낸 몇 순간을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고 유익한 순간으로 꼽을 수 있으며, 따라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만큼 정확하게 기억할 가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나 역시 시간의 점을 부여받았다. 그 일은 우리가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찾았던 둘째 날 늦은 오후에 일어났다.
내가 가끔 안락의자에 누워
마음을 비우거나 사색적인 기분에 잠겼을 때
수선화들은 그 내면의 눈앞에 번쩍하고 나타난다...
그러면 내 마음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
수선화와 어울려 춤을 춘다.
_숭고함에 대하여: 장소: 시나이 사막_ 안내자: 에드먼드 버크, 욥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작은 공간을... 생각해 본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또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무한히 광대한 공간들(I'infinie immensite des espaces que j'ignore et qui m'ignorent)이 작은 공간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것이 무섭고 놀랍다. 나는 저기가 아닌 여기에 있을 이유도 없고, 다른 때가 아닌 지금 있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가져다 놓았는가? - 팡세 단장 68
어떤 장소에서 느끼는 감정이 적절한 한단어로 표현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초가을 저녁 날빛이 희미해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 또는 빈터에서 전혀 움직임이 없는 물웅덩이와 마주쳤을 때 느끼는 감정을 전달하려면 이런저런 말들을 어색하게 잔뜩 쌓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절벽과 빙하, 밤하늘과 바위가 흩어진 사막을 보면서 느끼는 특정한 반응을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단어가 18세기 초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sublime: 이 말은 경우에 따라 웅장하다거나 장엄하다고 옮기는 것이 더 어울리기도 하지만, 이미 굳어진 이 단어의 번역어를 고려하여 일관성있게 숭고하다는 말로 옮기고 때로는 숭고미라는 표현도 사용했다.
이 말 자체는 200년경 그리스의 롱기누스가 썼다는 '숭고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유래했지만, 점점 잊혀지다가 1712년 이 글이 영어로 재번역되면서 새삼 비평가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크기, 공허, 위험을 통해서 이제까지는 연결되지는 않았던 다양한 풍경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었으며, 이러한 장소들이 기쁨을 주는 동시에 도덕적으로도 좋은 감정 - 확인 가능한 감정 -을 자극한다고 주장했다. 그 뒤로 풍경의 가치를 평가할 때는 단지 형식적인 미학적 기준(예를 들면 색깔의 조화나 선의 배치치이나 경제적 또는 실용적 기준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가 인간 정신을 숭고함으로 고양시키는 힘을 가지느냐는 것도 따지게 되었다.
책. 조지프 에디슨 - 상상력의 기쁨에 관한 에세이
나의 배낭에는 횃불, 해를 가릴 모자, 에드먼드 버크가 들어 있다. 버크는 스물네 살의 나이에 런던에서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숭고하고 아름다움에 관한 우리 이상들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썼다. 그는 단정적이다. 숭고함은 약하다는 감정과 관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은 많다. 봄의 초원, 완만한 골짜기, 떡갈나무, 꽃무리(특히 데이지 무리). 그러나 이런 것들은 숭고하지는 않다. "숭고함과 아름다움이라는 두 관념은 종종 혼동된다. 이 두 말은 서로 매우 다르고 또 정반대인 사물들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버크는 그렇게 불평했다. 사람들이 런던 교외의 큐에서 템스 강을 보고 입을 떡 벌리며 그것을 숭고하다고 부르기도 한다는 사실과 마주치고 젊은 철학자가 느낀 짜증이 느껴진다. 풍경은 힘, 인간의 힘보다 크고 인간에게 위협이 될 만한 힘을 보여줄 때만 숭고하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숭고한 장소들은 인간의 의지에 대한 도전을 부여준다. 버크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해주는 예로 거세된 수소와 거세하지 않은 황소의 비유를 들고 있다. "거세된 수소는 아주 힘이 센 동물이다. 그러나 순진한 동물이며, 매우 쓸모 있고, 전혀 위험하지 않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거세된 수소라는 관념은 결코 웅장하지 않다. 거세되지 않은 황소도 힘이 세다. 그러나 그 힘은 종류가 다르다. 매우 파괴적인 경우도 많다... 따라서 거세되지 않은 황소라는 관념은 위대하다. 따라서 이 관념은 숭고한 묘사에, 감정을 고양한느 비교에 자주 등장한다."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한다.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책책책
조지프 에디슨 - 상상력의 기쁨에 관한 에세이 (1712)
"광활한 공간을 보면 자연스럽게 '전능한 존재'에 대한 관념이 떠오른다."
토머스 그레이 - 서간집(1739)
"다른 어떤 논증의 도움이 없어도 무신론자에게 경외감을 일으켜 신앙으로 이끄는 장면들이 있다."
토머스 콜 - 미국 풍경론(1835)
"자연으로부터 한번도 벗어난 것 같지 않은 고독한 풍경은 창조주 하느님을 연상시킨다. 이런 풍경은 하느님의 더럽혀지지 않은 작품이며, 정신은 그곳을 보면서 영원한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랠프 월도 에머슨 - 자연 (1836)
"자연의 가장 고귀한 직무는 신의 유령 역할을 맡는 것이다."
_눈을 열어주는 미술에 대하여: 장소: 프로방스_ 안내자: 빈센트 반 고흐
"아, 프로방스!" 그들은 오페라 또는 델프트 도자기와 마주쳤을 때에나 보여주는 경의에 찬 표정으로 나지막이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우듬지들?
고흐는 화가로서 훈련을 받은 적은 거의 없지만 폴 고갱과 앙리 툴루스-로트레크를 사귀어 클리시 대로에 있는 탕부랭 카페에서 그들의 작품과 함께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나중에 반 고흐는 동생에게 파리에서 아를로 이사 온 이유를 두 가지 댔다. 첫째는 "남부를 그리고"싶었고, 또 하나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남부를 "보도록"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그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심을 품었을지는 몰라도, 이 기획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믿음은 한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즉 화가는 세상의 한 부분을 그릴 수 있고,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눈을 뜨게 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반 고흐가 예술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준다고 이렇게 굳게 믿게 된 것은 그 자신이 관객으로서 이런 힘을 자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 네덜란드에서 프랑스로 오면서 특히 문학에서 이런 힘을 강하게 느꼈다. 그는 발자크,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을 읽었으며, 이 작품들을 통해서 프랑스 사회와 심리의 역동성에 눈을 뜨게 된 것에 고마워했다. 그는 "보바리 부인"을 통해서 지방에서 사는 중간 계급의 생활을 배웠으며, '고리오 영감'을 통해서 파리의 가난하지만 야심만만한 학생들을 배웠다. 그는 이제 사회 전체에서 이런 소설의 등장인물들과 유사한 인물들을 알아보게 되었따.
마찬가지로 그림 역시 반 고흐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반 고흐는 그에게 어떤 독특한 색깔과 분위기를 보여준 화가들을 칭송하곤 했다. 예를 들면 벨라스케스는 그에게 회색을 볼 수 있는 지도를 주었다. 벨라스케스는 여러 점의 ㅇ화들로 이베리아의 수수한 실내를 묘사했다. 벽은 벽돌이나 침침한 석고였으며 더위를 막기 위해서 덧문을 닫아놓기 때문에 한낮에도 실내를 지배하는 색조는 바위 무덤 속 같은 회색이었다.
반 고흐에게는 관객이 세상의 어떤 측면들을 좀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작가의 증표였다. 만일 벨라스케스가 회색과 몸집이 큰 요리사의 거친 얼굴로 반 고흐를 안내해주었다면, 모네는 석양으로 안내를 해주었고, 램브란트는 아침의 빛으로 안내해주었으며, 페르메이르는 사춘기 소녀들에게로 안내해주었다 (반 고흐는 원형 경기장 근처에서 그의 작품 한 점을 보고 테오에게 감탄했다. "페르메이는 완벽해"). 반 고흐는 심한 소나기가 내린 뒤 론 강 위의 하늘을 보면서 호쿠사이를 떠올렸으며, 밀을 보고 밀레를 떠올렸고, 생-마리 드 라 메르의 젊은 여자들을 보면서 이탈리아 피렌체 화파의 화가 치마부에와 조토를 떠올렸다. (일본 우키요에의 대표 작가 1760-1849. 그의 작품은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강렬한 인상.)
페이지. 241부터
예컨대 우리의 초상화가 "우리를 닮지" 않았다고 불평을 할 때, 우리는 화가가 속임수를 썼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예술 작품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인 선택이 이 특정한 경우에 잘못되었으며, 우리 스스로 우리의 핵심적인 자아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수준이 낮은 예술은 보여줄 것과 생략할 것에 대한 일련의 수준 낮은 선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스트랄: 프랑스 지중해 연안 지방에 부는 찬 북서풍
반 고흐는 동생에게 말했다. "사이프러스가 줄곧 내 생각을 사로잡고 있어. 지금까지 내가 본 방식으로 그린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놀라워. 사이프러스는 그 선이나 비례에서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만큼이나 아름다워. 그리고 그 녹색에는 아주 독특한 특질이 있어. 마치 해가 내리쬐는 풍경에 검정을 흩뿌려놓은 것 같은데, 아주 흥미로운 검은 색조라고 할 수 있어. 정확하게 그려내기가 아주 어렵지."
사이프러스에서 반 고흐는 보았는데 다른 화가들은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일까?
-이런 움직임에는 건축학적인 이유가 있었다. 우듬지로부터 아래를 향해 부드럽게 내려앉는 소나무 가지들과는 달리 사이프러스의 잎은 땅에서 위를 향해 밀고 올라간다. 더욱이 사이프러스의 잎은 땅에서 위를 향해 밀고 올라간다. 더욱이 사이프러스의 줄기는 유난히 짧아, 위의 3분의 1은 완전히 가지로만 이루어져 있다. 떡갈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가지는 흔들리지만 줄기는 꼼짝도 않는데 반해, 사이프러스는 줄기 자체가 구부러진다. 나아가 줄기의 둘레를 따라 수많은 곳에서 잎이 자라나기 때문에, 여러 축을 따라 휘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멀리서 보면 그 움직임에 동시성이 없기 때문에 마치 여러 각도에서 불어오는 몇 개의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단. 사이프러스는 원뿔 모양이기 때문에(직경이 1미터가 넘는 경우가 드물다) 바람에 신경질적으로 퍼덕이는 불길을 닮았다. 반 고흐는 이 모든 것을 보았고, 또 다른 사람들도 보게 해주려고 했다.
반 고흐가 프로방스에 머문 지 몇 년 뒤, 오스카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 런던에는 안개가 없었다는 말을 했다. 마찬가지로 반 고흐가 사이프러스를 그리기 전에 프로방스에는 사이프러스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본 뒤에는 프로방스의 색깔에도 뭔가 특이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기후와 관련된 이유도 있었다. 알프스 산맥으로부터 론 골짜기를 따라 불어오는 미스트랄은 때마다 하늘에서 구름과 습기를 씻어가고, 그 결과 흰색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순수하고 풍부한 파란색만 남는다. 동시에 높은 지하수면과 훌륭한 관개시설 덕분에 지중해 기후 치고는 식물이 매우 무성하다. 이곳 식물은 물 부족으로 성장에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남부의 최고의 이점, 즉 빛과 열을 최대한 활용한다. 또 뜻밖에도, 공기 중에 습기가 없기 때문에, 프로방스에는 열대와 달리 나무, 꽃, 식물의 색깔을 축축하게 만들고 서로 뒤섞여버리는 뿌연 느낌이 없다. 따라서 구름 없는 하늘, 건조한 공기, 물, 무성한 잎들이 결합하여 생생한 대조를 이루는 원색들이 이 지역을 지배한다.
반 고흐 이전의 화가들은 이런 대조를 무시하고, 클로드와 푸생이 가르친 대로 서로 근접한 색들만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콩스탕탱과 비도
협죽도?
니체 "현실 자체는 무한하며 절대 예술로 전부를 나타낼 수가 없다."
반 고흐가 프로방스 화가들 중에서도 독특했던 것은 그가 중요하다고 느껴서 선택했던 것이 독특했기 때문이다. 콩스탕탱과 같은 화가들은 축척을 정확하게 맞추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반 고흐는 "닮은 꼴"을 만들어내는 일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지면서도, 궁극적으로 남부에서 중요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 축척을 걱정해서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동생에게 조롱하듯이 말했듯이, 그의 예술은 "경건한 사진작가들의 생산물들과는 다른 닮은 꼴"을 낳게 될 터였다. 현실 가운데 그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 때문에 가끔 왜곡, 생략, 색깔의 대체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가 여전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현실 - "닮은 꼴" - 이었다.
"나 자신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정확하게 재현하려고 하는 대신 색깔을 좀더 자의저기으로 사용해보려고 해...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볼게. 나는 친구 예술가의 초상화 '시인' 1888년 9월 초. 를 그리고 싶어. 그 친구는 위대한 꿈을 꾸는 사람이고, 나이팅게일이 노래를 하듯이 창작을 하는 사람이지. 그것이 그 사람의 천성이기 때문이야. 머리는 금발이 될 거야. 나는 그림 속에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고마움, 나의 사랑을 집어넣고 싶어. 우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가능한 한 충실하게 그릴 거야. 하지만 그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나는 자의적으로 색채를 다루는 사람이 될 거야. 나는 그 사람의 금발을 강조할 생각이야. 심지어 오렌지 색조, 크롬 색이나 밝은 레몬 빛 노란색으로까지 가려고 해. 머리 뒤에는 초라한 방의 보통 벽을 그리는 대신 무한을 칠할 거야.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풍부하고, 가장 강렬한 파란색으로 아무런 무늬 없이 배경을 깔아버릴 거야. 이렇게 환한 머리와 풍부한 파란색 배경을 단순하게 결합하여 신비한 효과를 얻어낼 거야. 짙푸른 하늘에 걸려 있는 별을 보는 느낌이 들도록... 오, 맙소사... 고상한 사람들은 이런 과장이 만화 같다고 생각하겟지."
몇 주 뒤 또 하나의 "만화"를 그리기 시작
"오늘밤에는 내가 식사를 하는 카페의 실내를 그리기 시작할 것 같아. 저녁에 가스등에 비친 실내 말이야. 이 카페는 심야 카페(cafe de nuit) -여기에서는 아주 흔해-라고 부르는데, 밤새 문을 열어두는 곳이야.(아를의 심야카페)
여기에서 "현실"의 어떤 요소들을 위해서 다른 요소들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그는 카페의 원근감이나 색채 배합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 그가 그린 전구는 빛을 발하는 버섯으로 변했고, 의자의 등은 활 모양으로 구부러졌으며, 바닥은 휘어졌다. 그럼에도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 장소에 대한 진실한 관념들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고전적인 예술 규칙을 따른다면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반 고흐의 생각이었다.
파스칼 팡세 '원래의 모습에는 감탄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닮게 그린 그림에는 감탄하니, 그림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 팡세 중 단장 40
그러나 파스칼의 경구는 예술 애호가들을 조롱하고자 하는 마음에 두 가지 중요한 점을 피해갈 위험에 빠져 있다. 만일 화가가 눈앞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좋아하지 않는 장소를 묘사한 그림에 감탄하는 것이 엉뚱한 짓이고 허세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그림에서 감탄할 수 있는 것은 대상을 재현해낸 기술적 솜씨와 화가의 찬란한 이름뿐일 것이다. 글러 경우에는 그림이 허망한 짓이라는 파스칼의 말에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알고 있었듯이, 화가는 단지 재현만 하는 것이 아니다. 화가는 선택을 하고 강조를 한다. 화가는 그들이 그려낸 현실의 모습이 현실의 귀중한 특징들을 살려내고 있을 때에만 진정한 찬사를 받는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사진
빔 벤데르스의 도시의 앨리스. 영화
조지프 애디슨 1712년 "우리는 자연의 작품이 예술 작품을 닮을수록 더욱더 기쁨을 느낀다."
8
_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장소: 레이크 디스트릭트, 마드리드, 암스테르담, 바베이도스, 런던 독랜즈_ 안내자: 존 러스킨
이백칠십일
할바사탕?
존 러스킨 1819년 2월 런던 출생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각적인 세계의 아주 작은 특징에도 유난히 민감. 서너 살 때
"나는 양탄자의 사각형들을 손가락으로 따라가고 색깔들을 비교하면서 며칠이고 즐겁게 보냈다. 또 마룻바닥의 옹이를 살피고, 맞은편 집의 벽돌 숫자를 헤아리면서 한동안 환희에 젖어 있곤 했다."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다섯 가지 핵심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타고난 성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이나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를 포함하여).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을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심리적이고 시각적인) 요인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관해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해서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도 데생을 연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었다. 즉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것이다. 눈앞에 놓인 것을 우리의 손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슨하게 관찰하는 데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그 구성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되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좀더 확고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한군데 가만히 앉아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린다고 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튼튼해지거나, 행복해지거나,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으면서 본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총알에게는 빨리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그가 진정한 사람이라면-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테크놀러지는 아름다움에 쉽게 다가가게 해줄지 모르지만, 그것을 소유하거나 감상하는 과정을 간단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진이 그것을 찍는 사람들 다수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러스킨의 열의는 사그라졌다. 사람들은 적극적이고 의식적으로 보기 위한 보조 장치로 사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대체하는 물건으로 사용했으며, 그 결과 전보다 세상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엇다. 사진이 자동적으로 세상의 소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예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 그것은 조개껍질이나 돌멩이에 대한 찬양일 수도 있다."
우리가 그림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득은 어떤 풍경이나 건물에 이끌리는 이유를 의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우리의 취향에 대한 섦여을 얻게 되며, "미학", 즉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는 능력도 생기게 된다. 이전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건물에서 무엇이 빠졌는지 판단하고 또 우리가 좋아하는 건물에서 무엇이 아름다움에 기여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감명 깊은 장면을 좀 더 빠르게 분석하여, 감동을 주는 힘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집어낼 수 있다.(석회암과 저녁 해의 조화, 나무들이 강 쪽을 향해 점점 가늘어지는 모습 등) 얼렁뚱땅 "이것이 마음에 들어"하고 말하는 것에서 좀더 정확하게 "이것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으로 넘어갈 수 있고, 그 다음으로 마음에 드는 것들에 대한 일반화를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
상감세공
러스킨은 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를 하라고 권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굳히려면 글을 써야 한다고, 그의 말로 하자면 "말로 그려야"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보는 것이 그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나는 학생들이 그림을 배우기 위해서 자연을 보라고 가르치기보다는, 자연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라고 가르치겠습니다."
귀환
9
_습관에 대하여: 장소: 런던 해머스미스_ 안내자: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팡세 단장 136
'자신의 침실을 여행. '나의 침실 여행', '나의 침실 야간 탐험'
'신대륙의 적도 지역 여행'과 '나의 침실 여행'은 여행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첫 번째 여행에는 뇨새 10마리, 짐 꾸러미 30개, 통역 4명, 크로노미터, 육분의, 망원경 2개, 보르다 경위의, 나침반, 습도계, 스페인 왕이 보내는 소개장, 총이 필요했다. 두 번째 여행에는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인 면 파자마 한 벌이 필요했다.
과거의 위대한 여행자들 '마젤란, 드레이크, 앤슨, 쿡'
'내 동생은 그런 탐험가들만큼 용감하지도 않고 부유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훨씬 더 실제적인 여행 방법을 발견했을 뿐이다.' 사비에르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지금까지 감히 여행을 떠나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여행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여행은 생각도 해본 일이 없는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예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돈도 노력도 들지 않는 즐거움을 찾아 출발하는 일을 망설일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는 특히 폭풍이나 강도나 절벽을 무서워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방 여행을 권했다.
안타깝게도 드 메스트르의 선구적인 여행은 그의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야기는 멋지게 시작한다. 드 메스트르는 문을 잠그고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인 파자마로 갈아입는다. 그는 짐을 챙길 필요도 없이 방에서 가장 큰 가구인 소파를 여행한다.
그럼에도 드 메스트르의 작품은 심오하고 의미심장한 통찰로부터 출발했다.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여행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가 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고 간다.
"지금 하늘이 잠들어 있는 인류를 위해서 펼쳐놓은 이 숭고한 광경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산책을 나가거나, 극장에서 몰려나오는 사람들이 잠시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서 빛을 발하는 찬란한 별자리를 감상하는 데에 무슨 돈이 들까?"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않는 이유는 전에 그렇게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우주가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습관에 빠져있다. 실제로 그들의 우주는 그들의 기대에 적당히 맞추어져 있다.
80년 뒤에 드 메스트르의 책을 읽고 그에게 감탄했던 (그리고 자신의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니체는 그 생각을 이렇게 밀고 나아갔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 하찮고 일상적인 경험 - 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 - 그 숫자는 얼마나 많은지! -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릭 ㅓ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위에 코르크처럼 까닥거리며 떠 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사막을 건너고, 빙산 위를 떠다니고, 밀림을 가로질렀으면서도, 그들의 영혼 속에서 그들이 본 것의 증거를 찾으려고 할 때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는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인 파자마를 입고 자신의 방 안에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우리에게 먼 땅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본 것에 다시 주목해보라고 슬며시 우리의 옆구리를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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